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세르게이 예이젠시테인 (문단 편집) == 생애 == [[영어]]도 잘해 [[미국]] [[할리우드]]와도 인연이 있었다. 할리우드 초기 발전을 이끈 인물이었던 더글러스 페어뱅크스와 [[메리 픽포드]]도 《[[전함 포템킨]]》을 보고 감명을 받아 예이젠시테인의 팬이 되었다고 한다. 그 덕분인지 할리우드에 초청받아 미국에 가기도 했는데, 이 당시 찍은 사진으로 [[찰리 채플린]]과 [[테니스]]를 치는 사진이 있는 등 화려한 인맥을 쌓기도 했다. [[월트 디즈니]]와도 친분이 있었다. 다만 나중에는 할리우드에 대해 좋은 시설과 장비가 있으면서도 [[서부극]] 같은 (시시한) 것밖에 못 찍는다는 식의 비판을 하기도 했다. 예이젠시테인의 미국 경험이 그닥 좋게 안 끝난 것도 있고, 미국에 넘어가서 야심차게 촬영하던 영화 <¡Que viva México!>의 스케쥴이 질질 끌리고 비자 문제 등이 꼬이면서 결국 포기하고 돌아왔고, 30년대 소비에트 연방에서 '''미국인들과 친분'''이 있다는 것은 주요 숙청감이었다. 이로 인해 30년대는 예이젠시테인에게 있어서 최악의 암흑기였다. 이 시기의 예이젠시테인은 방만한 촬영으로 인해 돈과 시간을 낭비하는 경향을 자주 보였었는데, 이게 결국 소비에트 연방에서 대참사로 번진다. 미국에서 귀국한 직후 계획하던 <베진 초원(Бежин луг)>이 2년간 200만 [[소련 루블|금루블]] 이상이라는 거금을 잡아먹었고, 간신히 완성한 직후엔 [[소련 장관회의|소비에트 연방의 인민위원회의]]가 계급투쟁보단 기독교적 선악의 투쟁에 가까운 내러티브를 문제삼아 내린 상영 중지명령 때문에 결국 엎어졌다. 그 때문에 당시 소련 영화계의 총책임자였던 보리스 슈먀츠키가 2년 뒤에 총살당하는 등 수많은 영화인들이 죽거나 [[굴라크]]로 끌려갔다. 다행히도 스탈린이 예이젠시테인의 영화들을 마음에 들어해서 <베진 초원> 사태를 예이젠시테인보단 그를 관리 감독해야 할 상급자들의 탓으로 돌리지 않았으면 예이젠시테인 본인부터가 총살당했을 판이었다. 예이젠시테인이 스탈린에게 한 번만 살려달라고 애원한 끝에 만든게 <[[알렉산드르 넵스키]]>였고, 이 작품이 완성도 높게 잘 만들어지면서 예이젠시테인은 한 숨 돌릴 수 있었다. 훗날 《이반 뇌제》 1부를 만들 때는 출세하지만, 2부에서 [[이오시프 스탈린]]을 [[풍자]]했다는 이유로 몰락한다.[* 마지막 장면에만 의도적으로 독일 표현주의식 조명을 사용해 공포감을 극대화했고 컬러로 촬영해 폭군의 이미지를 강화시켰다.] 사실 스탈린에 대한 풍자는 1부에서부터 만들어 놓았으나, 스탈린이 1부를 너무나 좋아한 나머지 2부의 제작은 장려했다고 한다. 2부에 대한 악평도 사실은 자신의 풍자보다는 [[취향입니다 존중해주시죠|취향에 안 맞아서라고...]] [[다큐멘터리]] 영화 [[알마아타]]에서의 에이젠슈테인에서 확인이 가능하다. 어찌 되었든 스탈린의 악평 탓에 3부의 제작은 좌초되고 남은 필름들이 파괴되었으며, 2부는 스탈린이 격하된 1958년이 되기 전까지 개봉조차 하지 못했다. [[1948년]] [[2월 11일]] 심장마비로 사망하였다. 사후 노보데비치 묘지에 안장되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